■ 기획특집 / 8·15 광복절 제74주년 '장충단 호국의 길' 탐방

시대의 혼란 등 격동을 목격한 공간 '장충단'

 

장충단 공원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충단비.

 

/ 2019. 8. 21

 

장충단의 시작은 조선 최초의 현충원

일제, 장충단 파헤치고 공원으로 조성

이준·유관순 열사 등 독립운동가 추모

 

일본 아베정권이 대한민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따른 '자유무역파괴'와 경제보복으로 인해 현재 양국은 어느 때 보다도 갈등이 증폭돼 있다. 현재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물론 아베정권 규탄 대회가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에 제74회 8·15광복절을 맞아 아프고 슬픈 역사를 되새기면서 '다시는 일본에 지지 말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지에서는 장충단 호국의 길을 통해 일제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바쳤던 독립 운동가들의 삶과 활동을 재조명한다.

 

장충단공원은 남산의 동북쪽 일대에 자리 잡고 있어 예전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다. 장충동의 동명도 바로 이 장충단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장충단 공원이 처음부터 공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공원일대는 조선시대부터 근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장충단공원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이 봉기하자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 이것이 계기가 돼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난다. 일본세력의 확장에 위기를 느낀 삼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조선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자 일본은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순국한 군인을 기리기 위해 1900년 최초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건립한다.

 

본래 장충단 자리에는 군사시설인 남소영이 있었다. 남소영은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는 어영청 소속의 군영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은 남소영 자리에 장충단을 세웠다. 궁궐에 침입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순직한 장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이후 장충단은 을미사변뿐만 아니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왕실을 수호하다 죽은 병사들의 충절을 기리는 일종의 현충원 역할을 수행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장충단에서의 제사를 금지했고 장충단비를 철거했다. 1920년대 후반 일본은 장충단에 벚나무 수천그루를 심어 항일 정신이 깃든 장충단을 위락을 위한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일본은 이곳에 이토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세웠다.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해방 후 장충단 공원은 각종 정치집회 장소로 이용됐으며, 1984년 근린공원화 된 이후 남산르네상스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 후 박문사를 포함한 일제의 건물들은 모두 헐리고 장충단비를 중심으로 위인들의 동상과 정치,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건물들이 세워졌다.

 

독립운동가 이준 열사, 유관순 열사의 동상과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3·1운동 기념탑 등이 들어섰다. 중구는 장충단 공원에 대한제국 이후 장충단과 남산에 얽힌 역사를 전시한 '장충단, 기억의 공간'을 장충단공원에 조성하고 2017년 12월 20일 문을 열었다. '장충단, 기억의 공간'은 장충단공원 내 공원장충경로당 지하1층을 리모델링해 만든 168㎡(35평) 크기의 상설 전시실이다.

 

전시실은 군인들의 제향공간이었던 장충단과 민족의 성산으로 목멱산이라 불리던 남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일제에 의해 공원화된 역사적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마련됐다. '장충단과 남산이 들려주는 역사이야기'라는 주제로 동국역사문화연구소장의 자문과 자료 감수를 받아 콘텐츠를 채운 것으로 △장충단의 건립부터 현재까지를 보여주는 '장충단을 만나다' △중구가 장충단과 남산에 조성한 도보탐방코스를 통해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를 따라 걷다' 등 2개 공간으로 구분돼 있다.

 

중구와 민주평통 중구협의회는 지난 15일 장충단 일대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며 '8·15광복 74주년 기념 평화통일 기원 호국의 길 걷기 행사를 가졌다.

 

이날 참가자들은 장충단 호국의 길 코스인 장충단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수표교, 이준 열사 동상,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유관순 열사 동상, 3·1독립운동 기념탑, 국립극장, 김용환 지사 동상, 반얀트리클럽, 장충체육관을 거쳐 장충단 공원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로 진행됐다.

 

▲장충단비

장충단은 1900년 고종이 건립한 제향공간으로 을미사변, 임오군란 등으로 희생된 충의지사들을 기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철저히 파괴됐으며 해방 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충단비가 장충단의 흔적이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명성황후를 보호하다 죽은 장졸들을 기리는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광복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장충단 사당과 건물은 파손됐고 장충단비 만이 남게 됐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1919년 유림대표 김규식은 서한 하나를 들고 파리로 향했다. 그가 가져간 서한은 일본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을 호소하는 글과 함께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은 것이었다. 서한은 파리평화회의에 제출됐고 이는 국제적 여론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수표교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던 다리로 숙종과 장희빈이 처음 만난 장소로 유명하다. 1959년 청계천 복계공사 당시 장충단으로 옮겨졌다. 조선시대 수표교는 물길을 건너는 다리역할 뿐만 아니라 청계천의 수위를 알려주어 홍수에 대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준 열사 동상

1907년 이준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무시속에 이준 열사는 울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순국하고 말았다. 1964년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장충단 공원에 이준 열사의 동상이 건립됐다.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일제 강점기 가혹한 민족말살정책 아래 최현배 선생은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말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7년 선생은 국어의 문법 체계를 최초로 정립한 '우리말본'을 출판했다. 이 기념비는 선생의 사후 1년이 지난 1971년 5월, 세종대왕의 생일에 세워졌다.

 

▲유관순 열사 동상

1919년 3·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모두의 누나 유관순 열사, 장충단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순국 50주년을 기념해 1970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동상은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제작했던 조각가 김세종씨의 작품이다.

 

▲3·1독립운동 기념탑

3·1운동의 정신을 기리고자 설립된 기념탑이다. 탑의 길이는 19.19m로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을 의미한다. 정부수립 50주년인 1998년 8월 15일에 착공해 3·1운동 80주년 기념일인 1999년 3월 1일에 준공했다.

 

▲국립중앙극장

1950년 아시아 최초로 설립된 국립극장이다. 민족문화를 보호, 육성하고자 했던 당시 정부의 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립극장은 현재 국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 등 4개 전속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김용환 지사 동상

광복후 일본에서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 동포로 구성된 단체, 재일본거류민단이 창립됐다. 김용환 지사는 거류민단에서 동포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1968년 괴한의 저격으로 순직하고 말았다. 이후 재일동포 성금과 정부 후원으로 1970년 동상이 세워졌다.

 

▲자유센터

1964년 설립된 자유센터는 반공연맹을 위해 지은 건축물이다.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씨의 초기 작품이기도 하다.

 

 

장충단 공원에 세워진 이준 열사 동상(좌), 유관순 열사 동상(우).

 

/ 2019.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