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0일. 중구민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남산골전통축제 및 중구민 한가족 체육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남산골 가요제에서 무려 3명의 가수가 탄생됐다. 가을밤 주민들에게 잊지 못할 감성적인 멜로디와 추억을 선사한 대상수상자 곽철성(신당3동)씨를 비롯한 금상 김송희(광희동), 은상 문양덕(소공동)씨 등 3명의 주인공들을 만나봤다. "대상 향한 맹연습, 결실 맺어" ◈ 대상 / 곽 철 성씨(48. 신당3동) 가요제를 위해 '돌아와요 부산항'의 황선우 작곡가와 가수 유현상 형인 유진 씨로부터 2개월 동안 철저한 개인 레슨을 통해 피나는 연습을 했다는 곽철성씨.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대상을 수상하고도 사실은 무덤덤 했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가수 못지않은 출중한 노래솜씨로 심사위원은 물론 주민들에게 극찬을 받은 그는 현재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평소 독창적인 목소리로 주변인들로부터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었던 찰라, 이번 남산골 가요제에서의 대상 수상은 그를 아동의류 납품 업종사자에서 가수로서의 제2의 인생을 가져다 줬다. "저보다 더 기뻐하는
◇지난 10월20일 청계천에 '꿈을 실은 종이배' 띄우기 행사를 축하하는 황포돛대가 띄워졌다. 47년 만에 다시 흐르게 된 청계천에 미래 꿈나무들의 꿈을 담은 종이배가 두둥실 띄워졌다. 중구문화원은 일곱 번째를 맞는 구민의 날과 중구문화원 개원 10돌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0월20일 청계천 모전교∼광통교 사이에서 '꿈을 실은 종이배 띄우기'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에는 종이배 띄우기 행사에 앞서 장교동 1번지 파리공원에 집결, 지난 10월12일까지 접수된 청소년 글짓기, 그림 그리기, 종이배 만들기 등의 3천 800여점의 출품작 중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작품에 대한 시상식도 함께 가졌다. 청소년 글짓기 단체부문 대상은 광희초가 차지했으며, 개인부문 장원 계성초 최자윤양, 장충중 이규빈군이 각각 차지했다. 또한 그림 그리기 단체부문 대상은 계성초가, 개인부문 장원은 동산초 이성준군, 덕수중 김윤아 외4명, 종이배 조형부문 대상은 광희초 진은영양 대경중 김도연군이 우수한 성적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외에도 우수한 작품을 제출한 800여명의 학생들이 수상자로 선정되는 기쁨을 안았다. 이어 계성초 사물놀이 '두드림'의 길놀이
예부터 정월 대보름날이면 원석(元夕)이라 하여 약밥과 약과를 만들어 먹는다. 약밥을 만들어 먹게 된 까닭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씌워져 있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정월 대보름날 신하들과 함께 천천정(天泉亭)으로 나갈 때 어디선가 까마귀가 은그릇을 물고 날아와 왕의 행차 앞에 떨어드리곤 주위를 빙빙 돌다가 날아가 버렸다. "괴이하다. 까마귀가 은그릇을 떨어뜨리고 가버리다니…." 하면서 측근의 신하가 은그릇을 주워 왕에게 바쳤다. 왕도 이상하여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튼튼히 봉해진 그릇 바깥 면에 "이 뚜껑을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하여 그릇을 열어 보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한 대신이, "그 한 사람이라는 것은 전하를 일컫는 것이 분명하니 이 그릇을 열어 보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됩니다." 하고 아뢰자 왕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여봐라 어서 이 그릇을 열어 보아라." 왕의 명에 따라 신하들이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만리 2동 전 양정고등학교 동쪽 운동장은 선조 때 재상 약봉(藥峰) 서생(徐生)의 집터로 서약봉터라 한다. 서성의 어머니 이씨가 이곳에 집을 수십 간 짓는데 비록 눈은 멀어서 보지 못하였으나 감역하는 것이 매우 치밀해서 정상인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씨가 보통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은 적이 있는 목수는 일부러 대청 기둥을 거꾸로 세워 그녀의 능력을 시험코자 하였다. 구석구석을 손으로 만지며 점검하고 있던 이씨는 즉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며 목수에게 잡을 것을 요구하자 목수가 기둥을 바로 고쳐 세웠던 일도 있다. 아직 젊었을 때 어린 아들 서성만 데리고 청상과부가 된 이씨는 아들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으나 아는 사람도 없고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떨어져 가서 막연하던 차에 약현객주에 머무르게 되었다. 평소 음식 솜씨가 뛰어났던 이씨는 묵고 있던 주막 집 주인이 혼자서 애쓰는 것을 보고 도와줄 요량으로 부엌으로 들어가 즉석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모두가 맛이 뛰어나다는 찬사를 보내주어 그곳에서 주먹밥을 만들었으므로 이를 약밥이라 하였고, 눈이 먼 이씨가 막걸리를 만들면서
◇양녕대군 친필로 알려진 숭례문 현판. 양녕대군(讓寧大君)은 조선 삼대 왕인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첫째 왕자인데 글 잘하고 글씨 잘 쓰는 왕자였다. 일찍이 세자에 책봉되었는데 태종대왕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忠寧大君)한테 왕위를 전하고 싶어하는 생각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 부왕(父王)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미친 체하고 여러 가지 해괴한 행동을 했다. 그래서 양녕대군은 세자 책봉이 되지 않았다. 그 동생인 효령대군은 양녕대군이 그렇게 되니까 세자 책봉은 자기한테 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부왕한테 잘 뵈려고 몸가짐이며 말씨와 행동을 각별히 조심하고 근신하고 글도 열심히 공부했다. 양녕대군은 효령이 떡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먼저 마시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꼬와서 하루는 효령을 발길로 걷어차면서 "충녕을 모르냐." 했다. 효령대군은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아차리고 절에 들어가서 늘 북만쳤다. 북을 치고 해도 북은 찢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부드러우면서도 찢어지지 않고 질긴 것을 '효령대군 북가죽'이란 말이 생겼다. 양녕대군은 왕위에 뜻이 없어서 해괴한
◇ 현재 남산타운 앞인 버티고개 전경. 신당동 끝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를 버티고개라 한다. 옛날 이 고개는 길이 좁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란 농담을 하였다. 옛날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하면서 도둑을 쫓았는데 그말이 변하여 번치(番峙), 버티, 버터 또는 한자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한성부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다니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 또 남쪽에는 벌아령(伐兒嶺)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그 그 아이를 못 나가도록 막았다는 것으로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숙종조에 있어서 남인(南人)들의 개문론에 반대하여 서인(西人)측에서는 같은 음양학적논리에 입각한 재문불길론을 들고 나왔던 것인데 결국은 '개문불길'의 주장이 관철되어 문제의 남소문(南小門) 재개(再開)는 실현을 보지
바뀐 신랑 - 수표교 답교놀이 때 술에 취한 이안눌 - 장충단공원 안의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수표교(水標橋)는 조선초 세종때 완공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다리는 지금부터 38년 전까지 중구 수표동(43번지)과 종로구 관수동(152번지) 사이의 청계천에 놓여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매몰되게 되자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도성 내의 청계천 위에는 8개의 다리가 걸려 있었지만 이 수표교는 그 중에서 아름답기가 으뜸이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모든 다리는 모두 복개되었지만 수표교만은 해체하여 장충단공원에 복원시켜 놓았다. "저 수표교는 원래 마전교(馬廛橋)라고 했다지요" "그렇다네. 이 다리 이름이 바뀐 것은 영조 36년(1760)에 큰물이 날 것에 대비해 청계천 수위를 잴 수 있는 수표(水標)를 세운 뒤부터 수표교라고 붙여졌다네" "그런데 수표(水標)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으음. 수표석(水標石)은 지금 청량리동의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 보존되어 있지" 한편 수표교에 얽힌 이야기로 다리 밟기를 빼 놓을 수
부엉바위 전설 ⓑ ― 암지네와 사랑을 나눈 한은석 ― <30호에 이어> "네? 노인장은 도대체 누구이시기에 남의 앞일까지 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나에 대해서는 묻지마오. 실은 그 계집은 사람이 아니라 수 천년 묵은 지네인데 사람의 진을 빼먹는단 말이오. 그동안 당신도 그 계집한테 진을 빼앗겨 왔는데 오늘밤을 마지막으로 당신은 죽고 마오. 하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하면 당신은 살수가 있소. 이 담뱃대에 담배를 꼭꼭 담아가지고 입으로 빤 후 입안의 고인 침을 절대로 뱉어서는 아니되오. 고인 입안의 침을 그 계집의 얼굴에 뱉으시오. 그래야만 당신은 살수 있소. 자아 이 담뱃대를 가져가시오."하고 노인은 한은석에게 담뱃대 한 개를 주었다. 한은석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괴이한 일이었다. 우연히 그 여인을 만나 그녀의 호의로 이렇게 호강을 해오는 터에 그 착한 여인이 자기를 해치는 무서운 지네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밤중에 부엉바위에 나타난 노인도 범상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노인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은석은 곰곰이 생각하며 노인이 시킨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