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심 속 역사박물관, 정동길로 떠나는 시간여행

'근대 문화유산 1번지' 정동길 탐방코스 '인기'

 

'근대유산 1번지'로 불리는 정동의 유서 깊은 근대유산들을 직접 둘러보는 탐방코스를 주민들이 돌아보고 있다.

 

대한제국 등 역사적 사건과 운명 같이한 유적 즐비

환구단·서울성곽·구러시아공사관·정동교회 등 4㎞

 

근대유산 1번지 정동을 걸어보자. 추억의 정동길에서 근대문화유산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지금도 근대 역사를 전하는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정동은 서울 도심 속 '근대유산 1번지'로 불린다. 근대유산 1번지 정동의 또 다른 특색으로 꼽을 만한 것은 유서 깊은 근대유산들이 각자의 내력을 소개하고 전해주는 박물관?전시관 또는 미술관 등으로 단장돼 생활 속에 친근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구가 '근대유산 1번지'로 불리는 정동의 유서 깊은 근대유산들을 직접 둘러보는 탐방코스를 운영해 인기를 끌고 있다.

 

구한말 역사적 사건과 운명을 같이 했던 유적을 탐방하면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덕수궁 돌담길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탐방코스의 포인트다. 정동 근대문화유산 답사는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탐방코스는 환구단부터 시작해 서울성곽터→임시정부서울연통지부→구러시아공사관→이화여고 심슨기념관→중명전→정동교회→배재학당 동관→구세군 중앙회관→성공회 서울성당을 지나 덕수궁 앞까지 탐방하는 약 4km거리의 코스이다.

 

탐방의 첫 발걸음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 환구단(?丘壇)이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돼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됐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됐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됐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다. 현재 환구단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됐다.

 

서울은 원래 성곽도시였다. 현재 성곽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서울 도심부근을 자세히 살피면 그 흔적들이 조금은 남아 있다. 중앙일보빌딩 뒤편으로 서울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서울성곽은 1396년(태조 5년)에 쌓아서 만든 것으로 수도인 한양을 에워싼 도성이다. 둘레 약18km에 높이는 대략 12m 가량으로 한양을 둘러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산 모양이 낙타 등의 모양, 종로 동숭동 소재)의 능선을 이었다.

 

서울성곽터를 지나 서소문터로 가는 길목에는 동화약품 본사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 연통부(연락부)로 사용되던 곳에 동화약품 본사가 있었다. 오늘날의 동화약품의 전신은 동화약방이었고, 동화약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 연통부 역할을 하기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약방으로써 현재는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고 한다.

 

서울 연통부는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3일 상해에 수립되자 임시정부의 활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국내외 비밀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서울 연통부의 총책임자는 동화약방(동화약품의 전신)의 민강 사장이 맡고 있었다. 동화약방은 연통부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독립자금 마련에도 한 몫 했다.

 

당시 60ml 짜리 활명수 1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먹을 수 있는 수준의 비싼 가격이었고, 독립운동가 들은 중국으로 건너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경향신문사 사옥을 지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빼곡이 자리 잡고 있는 거리로 들어선다. 빌딩 숲이 아닌 나무 숲으로 이어진 길은 여름날 무더위를 식혀줄 아늑한 휴식의 공간이다. 나무가 선물하는 그늘 길 초입에 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좌측 편에 구 러시아 공사관이 보인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세자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머물렀던 아관파천이라는 불리 우는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해 르네상스식 건물로 1885년 착공해 1890년 완공했다. 벽돌조 2층의 본관은 한국전쟁때 파괴되었고, 현재는 3층 규모의 탑만이 남아있다. 현재 탑의 동북쪽에 지하 밀실의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지하 밀실은 비밀통로로 경운궁(현재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러시아공사관 반대편 길에는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북감리교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에 의해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성교육기관이다.

 

이듬해에 고종황제가 이화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이화라는 교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후일 미국 컬럼비아 리버선교지회의 홀부룩 여사가 희사한 기금으로 1915년 3월 심슨기념관이 준공되었으며, 당시 세상을 떠나 홀부록의 동생 사라 심슨을 기리는 뜻에서 명칭을 심슨기념관이라 불렀고 한때 이화여중 교사로 쓰였다가 지금은 이화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심슨기념관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동극장이 보인다. 정동극장 뒤편으로 조선시대 황실도서관으로 쓰인 덕수궁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경운러시아인 사바틴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전각으로 이곳 중명전은 1905년 11월 18일 치욕적인 을사늑약을 강제당한 곳이다. 1907년에는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으며, 1907년 아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이양할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주로 중명전에서 국사를 처리했다. 후에 개인이 소유하던 것을 2006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정동극장 맞은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인 정동교회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885년 4월 감리교 아펜젤러 목사가 선교사로와 한옥 한 채를 구입해 예배를 봄으로써 정동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1897년 12월 현재의 자리에 최초의 개신교회로 건립되었으며 건축가 심의석이 시공을 맡았다. 정동교회는 일제강점기 항일활동의 거점으로서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등사됐다. 이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3년 복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동교회 앞 덕수궁 돌담 길 분수대 로터리에서 러시아대사관방향으로 내려오면 배재학당 동관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정동의 한 옥 한 채를 사서 학교를 개설했다가 1887년 최초의 서양식 벽돌양옥으로 배재학당 본관을 준공했다. 현재 남아 있는 배재학당 본관은 1916년 건립됐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독립운동가 지청천 등이 이 학교에서 배출됐다. 1984년 배재중고등학교가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면서 배재학당 동관만 남았고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됐다.

 

배재학당을 나와 미국공사관 방향에 따라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마음의 안정이 찾아온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매미소리도 이날만큼은 정겹게 들린다. 덕수초등학교, 덕수수영장 등 덕수궁에 덕수를 딴 이름이 붙은 건물들이 눈에 띈다. 그 중에 12월에나 들은 만한 이름이 있다. 바로 구세군 중앙회관이다.

 

영국에서 감리교 목사였던 영국인 윌리엄 부스에 의해 창시된 구세군은 1908년 10월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다. 캐나다와 미국 등지에서 모은 헌금으로 1928년 지금의 구세군중앙회관을 지어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했다. 구세군사관학교는 1943년 3월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1947년 다시 문을 열었다. 1959년 선교 50주년을 맞이해 증축 공사를 벌였는데, 이때 구세군중앙회관으로 불렀다. 구세군 자선남비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12월이다. 마지막으로 들러볼 곳은 구 국회의사당 맞은편에 자리한 성공회 서울성당이다. 1922년 영국인 A딕슨의 설계에 따라 영국 성공회의 지원과 국내 신자의 현금으로 착공되어 1926년에 완공됐다. 처음에는 십자가 형태로 설계되었으나, 양쪽 날개와 아래쪽 일부를 떼어낸 채 일자형 건물로 지어졌다. 영국 렉싱턴 지역의 한 박물관에서 설계도 원본이 발견되어 1996년 5월 축성식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본격적인 서양식 건물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