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 100년 만에 개방된 숭례문

중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재를 상징하는 '국보 1호' 숭례문이 100년 만에 개방됐다.

 

 일제 강점기인 1907∼1908년 숭례문 좌우의 성벽을 철거하고 전찻길과 도로를 내면서 자동차 도로에 쌓여 일반인의 통행을 제한한 이래 1세기 만이라고 한다. 답답하고 참혹한 역사만큼이나 숭례문도 힘겨운 한세기를 버텨 온 셈이다.

 

 조선 태조7년(1398)에 창건된 숭례문은 세종30년(1448)과 성종10년(1479)에 중건됐으며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됐지만 도로에 둘러싸여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건물의 평면은 높은 육축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구조와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고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만이 우물마루일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널마루라고 한다. 현존하는 성문 건물중 조선 초기의 건축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숭례문은 전형적인 다포(多包) 양식의 건물이며, 견실한 목조 건축물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한국 건축 사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라고 한다.

 

 이렇듯 역사적인 상징과 함께 국보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숭례문을 우리는 너무 오랬동안 방치해 왔다. 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어느 정도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고 국민들이나 관광객이 홍예문까지 올려다 볼 수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숭례문 개방을 위한 보수공사를 하면서 통로 박석 설치에 앞서 홍예문의 남북쪽 입구와 상부 누각의 좌우 계단 입구 등 다섯 군데를 조사한 결과 조선조 세종때 것으로 추정되는 아랫부분 석축 기단과 지대석(맨 아래 기초석), 박석(바닥에 까는 돌), 문지도리(문을 다는 돌 구조물) 등이 원형대로 발굴됐다고 한다.

 

 이는 숭례문의 기저(基底, 기초가 되는 것) 상당 부분이 그동안 땅에 묻혀 있는 바람에 실제 건축 당시보다 현재의 숭례문 높이가 크게 낮아져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발굴된 숭례문 지반 유구(遺構, 지난 날의 토목구조를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구조물의 유물) 가운데 홍예문 부근 지하층에서는 1.57m 높이의 대형 무사석(석축 기단을 구성하는 돌)과 확석(문짝을 들어 매는 홈파인 돌쩌귀), 검은 얼룩 묻은 박석 등이 원래 연결된 상태대로 확인됐다.

 

 이렇게 묻힌 부분을 모두 합하면 숭례문은 높이가 현재의 12.3m에서 13.9m로, 홍예문은 4.37m에서 5.97m로 높아진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1907년께 남대문을 관통하는 전차선로를 내면서 문 주위로 흙을 1m 가량 쌓아올려 아래쪽 기단과 박석들이 완전히 묻힌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일제 당시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훼손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 다시 이런 역사가 되풀이 돼서는 안되겠지만 잘못된 역사가 있으면 바로잡아야 한다.

 

 올바른 역사관과 주체성을 확립해 후손들에게는 제대로 역사관을 인식시키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물려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지혜를 모으고 정성을 다해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