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의 구전설화 ⑤

중구자치신문 제37호 7면 (2003년3월24일자)

바뀐 신랑

- 수표교 답교놀이 때 술에 취한 이안눌 -

 

 장충단공원 안의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수표교(水標橋)는 조선초 세종때 완공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다리는 지금부터 38년 전까지 중구 수표동(43번지)과 종로구 관수동(152번지) 사이의 청계천에 놓여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매몰되게 되자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도성 내의 청계천 위에는 8개의 다리가 걸려 있었지만 이 수표교는 그 중에서 아름답기가 으뜸이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모든 다리는 모두 복개되었지만 수표교만은 해체하여 장충단공원에 복원시켜 놓았다.

 "저 수표교는 원래 마전교(馬廛橋)라고 했다지요"

 "그렇다네. 이 다리 이름이 바뀐 것은 영조 36년(1760)에 큰물이 날 것에 대비해 청계천 수위를 잴 수 있는 수표(水標)를 세운 뒤부터 수표교라고 붙여졌다네"

 "그런데 수표(水標)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으음. 수표석(水標石)은 지금 청량리동의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 보존되어 있지"

 한편 수표교에 얽힌 이야기로 다리 밟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조선시대 중종 35년(1540)부터 서울 장안 사람들 사이에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12개 다리를 밟으면 일년 내내 재앙을 막고 각기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이 날은 통행금지마저 해제돼 많은 부녀자들이 장옷을 쓰고 나와 다리를 밟았다.

 부녀자들이 떼를 지어 답교(踏橋)하니 무뢰한까지 몰려들어 한데 어울렸다. 이에 남녀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한때 답교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선조(宣祖) 때에는 답교 풍속이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때 갓 장가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답교놀이에 어울렸다가 술에 취해 수표교 부근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이 되어 깨어보니 자기 신방(新房)이 아니었다. 이안눌은 정신이 번쩍 들어 옆의 신부를 깨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뜬 신부도 "에그머니, 아니…누구세요?"

 하며 이안눌 못지 않게 놀라는 것이었다.

 이 신부도 신혼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밤 늦도록 신랑이 들어오지 않자 하인들이 찾아 나섰다가 만취해서 쓰러진 이안눌을 신랑으로 알고 업어다가 신방에 재운 것이다.

 이안눌은 당황하며 신부를 바라봤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질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나는 제 팔자 소관이자 연분인가 합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마땅히 죽어야 할 일이나 늙은 부모의 무남독녀로 자라 어쩔 수도 없으니 소녀를 소실로 허락해 주신다면 이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나 역시 고의로 저지른 과오가 아니고 새댁 또한 화냥끼로 한 잘못이 아니니 소실로 맞이한들 상관이 있겠소. 그러나 엄친 슬하에 아직 과거에 오르지도 못한 주제에 어떻게 두 여인을 거느릴 수 있겠소?"

 결국 신부의 간청에 못이긴 이안눌은 부랴부랴 신부와 같이 그 집을 몰래 빠져나와 그 길로 신부를 이모집에 의탁시키고 과거에 합격하기까지는 서로 만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한편 신부집에서는 갑자기 신부가 온데 간데 없는지라 영문을 몰라 전후를 살핀 끝에 진상이 드러났다. 이에 신부집에서는 주의를 의식해 신부가 변사한 양 서둘러 장사를 치르고 수심의 나날을 보냈다.

 이윽고 몇 해가 지나 29세에 이안눌이 과거에 급제하자 그제야 신부를 소실로 맞이하였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신부의 노부모들은 기가 막힌 중에도 한편으로는 외동딸이 살아 있음에 기뻐하며 남은 여생을 그에게 의탁하였다.

 이안눌은 권 필, 윤근수, 이호민등의 많은 문인들과 교제하며 가깝게 지냈다. 이안눌은 이들과 함께 '동악시단(東岳詩壇)'의 모임을 만들어 현재 동국대학교 내에서 모임을 가졌다. 영조 때 예조판서, 판돈령부사를 지낸 이안눌의 현손인 이주진은 조상의 집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암벽에 해서(諧書)로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라고 여섯글자를 각자(刻字)해 놓았다.

 최근까지도 이안눌이 살았던 동국대학교 북문 가까운 암벽에는 '동악선생시단'이라고 쓴 각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각자는 1985년에 동국대학교에서 암벽을 헐어내고 건물을 세울 때 없어졌다.

 그 대신 부근에 '동악선생시단'이라는 글자를 큰 자연석에 새겨 놓았다.

(자료제공 중구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