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점포와 현대식 마트 '공존'
저렴한 가격에 우수한 품질 '만족'
남산타운 단지 입주자 외면 '한숨'
재래시장은 박제가 되어버린 슬픈 안개꽃이다. 죽음이라는 꽃말과 함께 간절한 기쁨 그리고 밝은 마음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안개꽃은 사랑의 뜻을 지닌 장미와 함께 곧잘 어울린다. 장미와 같은 서민들의 사랑과 오랜 세월 함께하며 재래시장은, 현재도 형상은 유지하고 있다. 약수시장은 달동네 시절의 정겨움이 지층마다 차곡차곡 저장된 그리움의 공간이다. 설 명절을 일주일여 앞두고 약수시장을 헤집고 다녔다. 약수시장의 명물, 떡의 감칠맛을 비롯해 각종 식료품의 신선함은 현재 진행형이었고, 어슴푸레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들썩거리는 음식점들은 약수시장에 넘실넘실 생기를 어리게 했다. 영세한 점포와 대형 마트가 약수시장 내에 공존하고 있었고, 현대식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전통적 시장의 콘트라스트를 골안개가 희미하게 감쌌다.
지하철 3호선 약수역 출구에서 나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눈을 붙잡는 건 가까이 있는 시장 풍경이 아닌, 먼 곳에 위치해 시선의 소실점으로 모이는 남산타운 아파트가 우뚝 솟은 모습이었다. 거리에 비례해 점점 작아져야만 하는 선원근법을 무너뜨리며 최종 위치에 있는 대상이 가장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상태는, 약수시장의 현주소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남산타운 아파트 단지가 완성된 후 약수시장은 완전히 죽어버렸어요.”
약수시장에서 만난 모든 상인들의 이구동성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약수시장을 수없이 지나다녔다. 지난해 10월 ‘2009 제3회 약수시장 한마음 축제’를 취재할 당시를 제외하고는, 약수시장을 지나가면서도 그곳이 약수시장이라는 의식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취재를 위해 다시 찾은 약수시장은 밝은 햇살 속에서도 스산했다. 약수시장으로 진입하는 입출구는 여러 곳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약수시장’이라는 간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약수시장은 구전설화였다.
“약수시장은 (등록시장이나 인정시장으로) 정식 등록되지 않은 상태예요. 중부시장이나 중앙시장처럼 간판을 달기가 쉽지 않은 점이 있어요. 또 상인들이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우선적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인식되고 있는 사항들이 있는 상황에서 상인 입장에서는 간판문제가 절실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약수시장번영회 김종렬 회장은 시장의 여러 입출구에 간판이 단 하나도 없는 현실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해줬다. 약수시장 상인들의 조직체인 번영회는 사무실도 없는 상태다. 김 회장이 운영하는 점포에서 진실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다. 고소하게 콧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참기름 들기름 향이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했다.
김 회장은 “정식 등록이 돼야 시설 현대화 사업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서 “중소기업청에도 알아봤고, 나름대로 약수시장을 살리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형편이 여의치 못하다”고 작게 탄식했다.
재래시장과 상점가의 시설 및 경영현대화와 시장정비를 촉진해 지역상권의 활성화와 유통산업의 균형 있는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된 재래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은 구랍 30일자로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으로 법제명 변경 및 일부 개정이 이뤄져 오는 7월1일 시행 예정이다. 현재 적용되는 재래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르면 재래시장은 상업기반시설이 노후화돼 개·보수 또는 정비가 필요하거나 유통기능이 취약해 경영개선 및 상거래의 현대화촉진이 필요한 장소로, 유통산업발전법 제8조 규정에 의해 대규모점포로 등록된 시장을 ‘등록시장’으로, 등록시장과 같은 기능을 행하고 있으나 유통산업발전법 제2조제3호의 규정에 의한 대규모점포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곳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에 적합하다고 시장·군수·구청장이 인정한 곳을 ‘인정시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김 회장은 “지원을 받아서 비가리개 지붕을 하는 등 환경개선사업을 실시하면 외형적으로 시장 분위기가 좋아지기는 할 것”이라면서도 “약수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특성화 등 변화된 실정에 맞춘 실질적인 경쟁력 강화가 필요해 보인다”고 견해를 나타냈다.
손님이 들어 대화가 중단됐다. 배낭을 등에 진 두 아주머니는 꽤나 멀리서 찾아온 차림새였다. 그들은 참기름과 들기름 등을 구입한 뒤 잠시 앉았다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김 회장은 “약수시장을 찾는 고객은 대부분 단골손님이다”고 귀띔했다.
“인근 신당2동과 장충동 등의 주민들이 이용하고 가깝게는 한남동 금호동을 비롯해 멀리서는 화양동 같은 데서도 약수시장을 찾으세요. 남산타운이 들어서기 전, 이 동네에 살던 분들이 잊지 않고 계속 와 주시는 것 같아요.”
정식 등록이 돼 있지도 않고 간판도 없는 약수시장은 세인의 관심과 기억에서는 서서히 잊혀지는 가운데 오직 단골들의 마음속에서만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해 약수시장 축제 때가 떠올랐다. 텅 빈 행사장에 잠깐 동안 홀로 앉아 ‘연극이 끝난 후’를 흥얼거렸다. 가요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계속 참가자가 늘어났었다.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해 너무나도 흥겹게 진행된 축제를 모두 마치니 허탈했다. 벌써 3회째, 축제를 통한 약수시장 홍보와 이미지 제고 그리고, 직접적인 매출증대 효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김 회장은 “당초 취지는 축제를 통한 약수시장 활성화 도모였는데, 첫 회 때는 비가 와서 잘 안 됐고 2ㆍ3회는 그럭저럭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면서 “올해도 가능하면 발전적인 축제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종렬 회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싸늘한 바람이 부는 길 위에 나섰다. 도로 중앙에 그어진 선을 따라 외줄타기 하듯 천천히 걸음을 하나씩 내디뎠다.
약수시장 상인들만의 축제, 약수시장을 기억하는 사람들만의 공간, 이곳은 그렇게 세상과 단절돼 화석화돼 가고 있었다. 바로 맞닿아 있는 남산타운 아파트 입주자에게서조차 그저 스쳐 지나가는 통로에 불과한 외면받는 존재다.
남산타운이 들어선 지 어느덧 10년 정도가 흘렀다. 5천 세대 정도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후 약수시장 경기는 완전히 기울었다. 한 상인은 “(남산타운 아파트 건립) 재개발이 추진될 때만 해도 입주자들이 약수시장으로 유입될 것으로 기대했다”면서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아파트에서는 이곳에 전혀 오질 않는다”고 체념하듯 전했다.
약수시장의 역사는 50년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전해 들었다. 현재의 남산타운 자리 언덕은 달동네의 전형이었다.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꿈과 희망이 있어 지금과는 또 다른 행복이 있던 시절, 약수동 달동네 사람들은 약수시장을 애용했다.
50년 정도 기간 동안 음료수 설탕 라면 등 식료품과 담배를 판매해 온 곽정신씨는 “그 시절에는 이 정도만 가지고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었다”면서 “지금은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들려줬다.
달동네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약수시장을 거쳐야만 했던 때였다. 40년 정도 약수시장의 흥망성쇠를 함께하며 현재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있는 정성열씨는 “예전에는 노점이 많아서 약수시장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면서 “그 점포들 모두 장사가 참 잘 됐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약수시장은 남산타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과 후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산타운이 들어선 후 약수시장에는 현대적인 마트가 생기기 시작해 현재 몇 개가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슈퍼마켓 형태의 점포를 경영하고 있는 조호진씨는 “재래시장 상권이다 보니 박리다매에 중점을 두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산지 직송으로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아 저렴하면서도 신선도 높은 상품으로 고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쾌적한 시설과 좋은 서비스를 갖춘 마트조차도 남산타운 입주자들에게는 외면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당2동과 장충동의 주민중 나이가 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비교적 너른 약수시장 길을 계속 오르내리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가래떡을 한가득 운반하고 있는 장한(壯漢)들이 눈에 띄었다. 허름한 건물 안에 있는 몇 개의 떡집에서는 쉴 새 없이 일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22년째 떡을 제조해 판매를 해 오고 있는 최복수씨는 “최상 품질의 쌀을 이용하면서도 가격은 저렴하고, 특히 맛이 좋은 장점이 있다”면서 “정수된 깨끗한 물을 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약수시장 떡집들이 각자 노하우를 바탕으로 좋은 떡을 만들어 오랫동안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떡은 약수시장의 명물로 예전부터 정평이 나 있는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명맥은 이렇듯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분주한 떡집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한 상인은 “설 경기는커녕 장사가 너무 안 돼 떠날 생각이다”고 차갑게 말했다.
처음과는 반대편, 오르막길의 맨 위쪽에 서서 남산타운 아파트를 등지고 약수시장을 내려다 봤다.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에는 소멸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리워져 있었고, 상인들의 주름 사이에는 간절한 기쁨이 배어 있었으며, 책가방을 메고 시장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고 있는 학생들에게서는 밝은 마음이 전달되고 있었다.
◇약수시장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