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트 선수육성이 아닌
교과과정으로 교육하는 것”
권응팔 교장은 리라초등학교 전인교육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다. 6ㆍ25전쟁 상흔의 자리에서 시작해 오늘날 알찬 교육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리라교육의 기저에는 권 교장의 지역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
“경찰복을 입은 날 보고 애들이 막 도망을 치는 거야. 무슨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초콜릿 달라고 애들이 미군한테 몰려들고 그랬어. 애들이 전문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연로한 데다 몇 차례 수술을 겪은 권 교장의 목소리는 다소 걸걸했지만, 내용은 명징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중학교가 6학년까지였어. 중학교 5학년 때 전쟁이 나서 (학력이) 스톱이 된 거야. (그 학력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거야.”
권 교장은 “(내가) 뭘 알았겠느냐”고 겸손한 뜻을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구두닦이 소년 등이 교육 기회를 통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은 당시로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다. ‘주간화보’ 1953년 5월18일자에는 학생수가 120명이나 된다고 나온다.
동계올림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권 교장은 “스케이트 선수로 키우고 싶어서 자녀를 우리 학교로 전학시키려는 문의가 이따금 온다”면서 “우리 학교에는 스케이트부가 없다고 그때마다 말하고 다른 학교를 알아보라고 한다”고 얘기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잖아. 선수 육성이 아니라 수영 스케이트 모두 다 교육으로 하는 거예요. 전문직업기술도 필요했지만 환경적응도 중요한 거였어.”
머릿속 지식만 강조하지 않고, 배우는 학생이 세상 속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소망과 사랑이 느껴졌다. 이미 수십 년 전에 학생의 교통사고 예방과 안전 등을 위해 노란색으로 교복 등을 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부경찰서 경찰관이어서 알고 있었지. 노란색은 사람 눈에 잘 띄는 색이에요. 골목 같은 데서 놀다가 차가 오면 위험할 수 있잖아. 브레이크도 더 빨리 밟을 수 있어.”
오랜 세월 역사를 담은 권응팔 교장의 얘기는 학생과 사회를 향한 애정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