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다시 쓰다(-침묵의 봄을 읽고-)

서울시 중구 청구동 작은 도서관 방혜리
2025년 대통령기 제45회 국민독서경진 중구대회 대상작품

 

윤택한 생활을 보장하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신축 아파트는 고급스럽고 깔끔하기 그지 없는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최신식 아파트 였다. 우리 가족은 실거주 목적의 집 한 채를 항상 꿈꿔왔고, 남편과 나는 큰 결심 끝에 대출을 받아 이 집을 매입하였다.


아기자기하게 집을 꾸미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굴뚝같았지만 그동안 집주인 눈치에 벽에 못질 한번 제대로 못하며 살아온 서러움이 마음 속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 집이 우리집이라니!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쌓여 있던 감정들이 눈물로 터져나왔다.


5분만 걸어가면 3년 전 개통한 지하철역에 당도할 수 있는 역세권 이라는 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집 근처에 주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할 수 있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관리사무소에서 열쇠를 받아 입주하던 첫날의 설렘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며칠을 뿌듯한 마음으로 잠들었고, 설레는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렇게 행복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입주한지 겨우 넉 달이나 지났을까. 맑게만 흐를 것 같던 하천이 쇠파리가 너무 많이 생겨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산책은커녕 하천 근처를 지나가는 것조차 어려워져 버렸다. '창궐'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주민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이어졌고, 결국 구청에서는 긴급 예산을 편성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살충제를 뿌리는 작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쇠파리의 개체수는 급감했고, 하천은 다시 쾌적한 환경을 되찾았다.


그러나 두 달여에 걸친 방역 작업이 끝난 지 2주쯤 지났을까. 시도 때도 없이 잔기침이 나기 시작했고 기침 때문에 밤에 잠마저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처음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자 남편도 자꾸 기침을 하며 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천에서 매일 해순 할머니와 산책을 하던 누룽지색의 곱슬털 룽지가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키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룽지의 소식을 들은 다음날, 해순 할머니마저 갑자기 호흡 곤란으로 쓰러지셨고 현재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개발 아파트의 주민들의 다수가 날이 갈수록 가슴 압박감과 호흡 곤란, 두통, 기침 등의 증상을 호소해왔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쇠파리 방역 작업에 사용된 살충제에 포함되어 있던 '염화메틸렌'이었다. 이 성분은 체내에 들어가 일산화탄소를 생성하고 결국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은 살충제라는 물질 자체에 있지 않다.


진짜 근본적인 문제를 자연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있다. 자연의 자정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즉각적인 편의만 을 추구하며 진행되는 개발은 곧 '해충 박멸'이라는 명목으로 이어 지고 다시 독성 물질 남용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라는 악순환을 만든다.


위의 사례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실제로 일어날 법한 경고를 담고 있다. 작은 곤충 몇 마리를 없애기 위해 뿌린 화학 물질이 결국 인간을 없애버린다면? 인간 박멸은 결코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는 해충을 없애기 위해 뿌린 살충제, 제초제 등으로 인해 절멸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의 사례가 적나라 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름철마다 모기 기피제를 난사하다가 켁켁 거리며 모기 잡으려다가 사람 잡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1954년, 미시간 주립대학의 조류학자 조지 월러스와 제자 존 메너가 수행한 울새 연구다. 살충제가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음에도, 그 살충제가 묻은 토양에서 자란 지렁이를 먹은 울새가 중독되어 죽었고, 결국 울새들의 번식력에도 문제가 생겨 절멸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간접 중독은 울새뿐 아니라 지렁이를 먹이로 삼는 다양한 조류와 포유류에게도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식탁 위에 올리는 인간 역시 이 연쇄 작용 끝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공포는 결코 비약이라 할 수 없다.


「침묵의 봄」에 기록된 사례들은 무려 약 70년 전인 1950~6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 '이제는 살충제가 좀 더 안전하게 개발되지 않았을까라는 기대감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유독물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예가 바로 러브버그 창궐 사태다. 은평구는 2014년부터 봉산에 편백림을 조성하기 위해 참나무와 아카시아를 제거하고 단일종 편백나무만을 심었다. 그 결과 생태계의 다양성이 삽시간에 무너졌고, 대벌레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 1차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충제를 살포했지만 대벌레와 유사한 곤충들까지 함께 죽으면서 봉산의 생태계는 더 불균형해졌다.


게다가 그 틈을 타 외래종인 러브버그가 들어와 개체수가 폭증하는 2차적 문제가 발생하였다.


러브버그의 창궐은 단순히 해충 문제가 아니다. 이는 자연의 복잡한 균형을 '단일종 조성'이라는 개발이 깨뜨린 결과이며,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살충제 살포가 또 다른 문제를 만드는 악순환의 한 단면이다.


우리는 곤충을 익충과 해충으로 구분하지만, 그 기준은 '오직 인간 에게 이로운가 아닌가'로만 결정한다. 단어의 형성과 분류 자체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말이다. '개발'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 또한 '토지나 천연자원 따위를 유용하게 만듦'인데, 이 유용성 또한 역시나 인간에게 실익을 주는지를 중심으로 판단을 내린다.


인류가 생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생태계를 구성하는 대기, 토양, 물 등의 무기환경과 동식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하며 오랜 세월 동안 정교한 균형을 이루어 왔다. 인간에게 생명으로 가득찬 생태계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다를바없이 지구에 얹혀사는 존재일 뿐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적 질서에 개입하여 간사한 유독물질로 잠깐의 쾌적함을 얻으려는 시도는 결국 인간 스스로를 해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진정한 쾌적함은 기술적 개발이나 편의성 추구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과의 공존과 균형 속에서만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진다. 이제는 질문을 바꾸어야 할 때다. 우리는 자연을 더 '잘' 통제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자연의 언어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