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친필로 알려진 숭례문 현판.
양녕대군(讓寧大君)은 조선 삼대 왕인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첫째 왕자인데 글 잘하고 글씨 잘 쓰는 왕자였다.
일찍이 세자에 책봉되었는데 태종대왕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忠寧大君)한테 왕위를 전하고 싶어하는 생각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 부왕(父王)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미친 체하고 여러 가지 해괴한 행동을 했다.
그래서 양녕대군은 세자 책봉이 되지 않았다.
그 동생인 효령대군은 양녕대군이 그렇게 되니까 세자 책봉은 자기한테 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부왕한테 잘 뵈려고 몸가짐이며 말씨와 행동을 각별히 조심하고 근신하고 글도 열심히 공부했다.
양녕대군은 효령이 떡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먼저 마시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꼬와서 하루는 효령을 발길로 걷어차면서
"충녕을 모르냐."
했다. 효령대군은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아차리고 절에 들어가서 늘 북만쳤다.
북을 치고 해도 북은 찢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부드러우면서도 찢어지지 않고 질긴 것을 '효령대군 북가죽'이란 말이 생겼다.
양녕대군은 왕위에 뜻이 없어서 해괴한 행동만 거듭했기 때문에 종내는 세자 책봉도 폐립되고 말았다.
자유로운 몸이 되자 경향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흥이 일어나면 시를 지었다. 어떤 절에 가서 지은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산하조작반(山霞朝作飯)-산에 낀 안개는 아침밥을 짓고
나월야위등(蘿月夜爲燈)-덩쿨에 걸린 달은 밤에 등잔불 된다
독숙고암하(獨宿孤岩下)-외로이 서 있는 바위 밑에서 혼자 자니
유존탑일층(唯存塔一層)-탑은 한 층만 남아있다.
남대문에 걸려 있는 숭례문이란 현판(懸板)은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 현판이 떨어져서 다른 사람 글씨로 현판을 만들어 달았다. 그런데 다른 현판을 달았더니 떨어져 버렸다. 다시 달면 또 떨어졌다. 몇 번 고쳐 달아도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광해군 때 청파(靑坡) 배다리에 있는 웅덩이에 서기(瑞氣)가 비쳐서 그 웅덩이를 파 봤더니 양녕대군이 친히 쓴 숭례문의 현판이 나왔다.
이것을 갖다가 남대문에 달았더니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숭례문의 현판은 그 현판이라고 한다. 훌륭한 글씨는 신기한 영검이 있다고 한다.
(자료제공 중구문화원)